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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서 김인후의 문하생 호암 변성온과 그의 동생 인천 변성진의 업적을 기리는 정자이다.

    1815년 10월 호암의 5대손 변동빈에 의해 건립되엇으나 오랜 세월 유실되었다가 1954년 재 건립되었고 같은 시기 영모당 재실도 건립 되었다고 한다

    두암초당중건기

    산은 '호암'이고 물은 '인천'인데 호남의 명승지에 일찍이 양 선생이 사셧는데 형은 호암이요 동생은 인천으로 우리 동방에 은덕 군자이자 아울러 유림의 으뜸이었다

    바위의 곁에 금반 모양의 땅이 있었는데 호암, 인천 양선생의 옛날 여묘살이 했던 곳이다. 여묘가 헐어서 집이 되었는데 집의 이름은 영모였다. 이는 양 선생의 부모에 대한 효를 생각하는 집이다. 이후 당이 철거되고 이내 무덤이 되었는데 호암선생의 옷과 신발을 묻었던 장소가 되었다.

    선생의 오세 손 평암공이 말하기를 두락암으로 당을 옮기지 않음은 불가한 일이라고 하였다. 땅의 모양이나 산세는 비록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제사지내고 수양하는 장소로는 옛날의 집과 같은 맥락이었다. 또 선생의 아버지 첨추공의 호가 두암인데 산과 바위 돌이 모두 함께 의탁하는 곳이었다. 황 이재 선생이 그 사실을 기록하고 평암공이 그 일을 도왔는데 대개 바위와 집이 함께 궤를 같이 함이 옛 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월이 오래되고 집은 허물어졌는데 항상 전하기를 변 초당 유허지라고 하였다. 과거 신묘년에 할아버지 월암공이 기초를 닦아 동쪽 변에 수간의 띠집을 지었는데 또 비바람에 의해 곤란해졌다. 아! 십세손이 비록 외롭고 한미하나 당을 짓는데 힘쓰지만 그러나 부싯돌 불은 순식간에 사라지듯 백세 유적을 장차 버려두는 즉 이는 불초자가 노심초사 아침과 저녁까지 방치해 둘 수 없음이니라. 수십년을 경영하여 기와로 지붕을 하니 구름과 숲과 호수와 산이 다시 옛 모습을 보는 것같이 새로워졌다. 다만, 그 집을 순환하여 거닐어보니 또한 생각이 여전히 일어나는구나!

    선조의 덕을 기록함이 가장 큰 의이니 장석이 자귀를 쓰는 듯 하니 오히려 차제의 일은 이에 광란과 같으니 홍수가 났으나 능히 산을 허물지 못하는구나! 이에 돌이 떨어지지 않고는 전할 수 없음이 같은 흐름임을 알겠다. 시경1)에 말하기를 태산은 저렇듯 험준하지만 노나라 사람들은 우러러 본다고 했으니 다만 지금의 저 호산이 오직 돌이 험하게 붙어 있어 우리나라 사람이 우러러 보기 어렵고 우리 집안도 그렇다. 이에 호암은 병산옹2)이 가르침을 본받은 주자 선생이 바위에 거처하는 것으로 나아감과 같다고 하겠다. 하물며 우리의 본받음이 작은 믿음이겠는가! 더러움이 생기지 않도록 하자꾸나! 이에 스스로를 경계함이 고인의 평천장이 남긴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