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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운(白南雲, 1894년 2월 11일~ 1979년)은 1894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그 뒤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강화보통학교의 교원으로 근무하였다. 그 뒤 일본으로 유학, 동경고등상업학교와 도쿄상과대학을 졸업하였다. 그가 일본에 유학중일 무렵 일본의 지식인계층에서는 마르크시즘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도쿄상대에는 사회주의 경제학자들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마르크시즘에 기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백남운은 도쿄상대를 졸업하고 귀국,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1925년 조선공산당이 비밀리에 창당됐다.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에도 이미 공산주의는 들어와 있었는데, 조선공산당의 창당을 계기로 일제가 지속적으로 탄압했는데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는 항일운동과 연결되면서 끈질기게 확산되어갔다. 그는 마르크스의 유물사관과 계급투쟁론의 입장에 서서 조선역사를 강의하였으며, 강의활동과 함께 저서로 1933년 조선사회경제사를, 37년 「조선봉건사회경제사」를 각각 펴냈다. 경제학자로서 명성이 알려지면서 그를 따르는 학생들이 많아져 백남운은 ‘경제연구회’라는 사회주의적 학생동아리를 이끌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것을 빌미로 그를 잡아들여 2년여 남짓 투옥했다. 1940년 석방되었고, 그는 그 뒤 학자들과 교류하는 것 이외에 은둔의 생활을 보냈다. 1945년 8·15와 함께 백남운은 우선 조선학술원을 창설하고 경성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그뒤 진보주의적이거나 사회주의적인 학자들을 기둥삼아 새 국가를 건설할 이론을 뒷받침하는 일에 전념했다.

    월북이후

    48년 5월 10일로 총선거 일정이 잡힌 남한에서의 북행이냐, 남한 잔류냐의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백남운은 물론 북행을 선택했으며, 5·10 총선을 맹비난하며 1948년 4월 평양의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다. 이 연석회의에서 그는 처음에 김일성과 박헌영에 이어 연설을 하였으며 사흘째 회의에서는 사회자를 맡기도 하였다. 이 북행은 그로서는 열두번째 북행이면서 마지막 북행이었다. 그뒤로 그는 남북협상이 끝난 뒤 아주 평양에 눌러앉았다. 그동안 백남운은 수많은 남한의 지식인들을 월북시키는 중개 역할을 하였다.

    1946년 1월 첫번째 북행때 북한으로부터 남한의 과학자 예술인교수 등의 월북을 주선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서울로 돌아온 그는 지식인들을 포섭하여 역사학자인 김석형과 박시형, 섬유분야 권위자 계응상, 물리학자 도상록, 기술자 최재우와 강영창 등과 예술인 문예봉, 황철, 박영신 등의 월북을 주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행길에 올랐던 남한 사람들은, 특히 정치인들은 거의 모두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러나 백남운은 홍명희처럼 매우 예외적으로 비교적 평탄한 출세길을 걸었다. 그는 북한정권의 초대 내각에서 교육상으로 선발되어 8년 동안 재직하였고 북한 과학원 원장을 겸했다. 1961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에 뽑혔고, 1967년 최고인민회의 의장으로 피선되어 5년 동안 근무하였다. 그 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의장으로 활동하다가 1979년 별세했다.

    저서

    조선민족해방투쟁사, 조선력사교재의 <3국시대 사회구성체 논쟁> 편찬에 참가

    역사관

    백남운은 한민족의 역사가 원시씨족공동사회에서 출발해 삼국시대의 노예경제사회를 거쳐 통일신라와 고려의 아시아적 봉건사회에 이르렀으며 현재에와서 상품생산재사회가 진행되고 있다고 보았다